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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홈페이지

대곡리

소정면 마을 대곡리 사진

지리

삼준산과 연암산이 마주한 곳에 자리한 산촌마을이다.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하였으며 마을 앞으로 대곡천이 흘러든다.

연혁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보이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신석기시대의 돌칼과 돌 화살촉이 출토(出土)되었으며 산의 모양으로 보아 혈거부락(穴居部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조선 시대 때는 역리(驛里) 부락으로 김제역(金提驛)이었다. 본래는 전의군 북면(北面)의 지역이었다. 북면(北面)의 ‘대사동’과 ‘맹곡리’의 이름을 따서 대곡리(大谷里)라 하여 전의면(全義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소정면이 신설되면서 소정면에 편입되었다.

지명유래

01
역말

맹골 북쪽 큰 길가에 있는 마을을 역말 또는 역리(驛里)·김제역말·진계역말이라 부른다. 본래(本來) 천안군(天安郡) 소동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시대 때 김제역(金提驛)이 있었던 마을이다. 또한 역말은 ‘학수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모양이 학 모양 같고 그 가운데 내가 흘러 ‘학수동’이라고도 부른다.

02
한적골

대곡리(大谷里)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고등이재’ 밑이 되는데, 예전에 큰 절이 있었다 하여 ‘한적골’이라 부른다. 3층 석탑이 있으며 ‘대사동(大寺洞)’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는 중들의 피난처였다.

03
맹골

‘한적골’ 북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맹씨(孟氏)가 살았다 하여 맹골, 맹곡(孟谷)이라 부른다. 이곳엔 마을 위 논에 맹꽁이가 많이 울어서 맹곡, 즉 맹꽁이가 우는 골짜기 마을이란 이야기도 있다.

04
궁말

‘역말’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앞들에 궁답(宮沓)이 많이 있었다 하여 궁말, 궁리(宮里)라 부른다.

05
관터

옛날 관청이 있었던 터이다.

06
학수동

대곡 3리는 학이 날아가 앉는 형상이기에 학수동이라고도 한다. 옛날 이곳이 말을 갈아타는 곳이어서 역말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역말 주변으로 해서 마을이 조그맣게 있었는데 1979년에 자리가 좋지 않다고 현재의 위치인 학수동으로 옮겼다. 학수동은 천안과의 경계라 이곳에서 장도 열렸다.

07
조랭이터(과부터)

2리와 연결된 길 있는 부근 안쪽 논밭이 있는 곳으로 이곳에다 집을 지으면 3년 동안은 잘 되는데 3년 뒤에는 망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곳 지형 형세가 조랭이와(복조리) 비슷해 옛날 밥을 지을 때 쌀을 3번 정도 씻고 조랭이를 털었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이유인지 남자들이 죽고 과부가 생기며 남편 없는 집은 금방 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부터라고도 한다.

08
한절골, 한적골, 대사동

현재 마을 입구에 장승이 있어 장승마을로 윤년이 드는 해에 장승을 세우며 장승제를 지낸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한절골은 골짜기가 많고 큰절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 또 한 번 들어오면 막다른 곳이라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한다 해서 한절골이라고 한다. 1979년도에 민속보전마을로 지정되었다가 1982년쯤에 해제되었다. 한적골, 한절골이라고도 하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대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승려가 만여 명을 헤아렸으며 유적지와 초석이 완연히 남았었다고 한다. 거대한 석탑이 4층으로 되어 있고 그 크기가 추녀에 들어가 비를 피할 만하였다고 한다. 또 천수가 용출하였는데 물이 맑고 동온하정하여 척서정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위의 탑은 매몰된 듯 자취를 찾을 길이 없고 현재 마을 입구(수살)에 장승이 있어 윤년이 드는 해에 목장승을 새로 깎아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고 있다.

09
구병산

마을 동쪽에 있는 산으로 능성구씨네 산이며 조상이 조선 시대 때 병마절도사가 나와서 구병산 이란 말도 있으며 또 다른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 때 이곳이 격전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작전 계획을 세워 구병산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10
승절골(승적골)

한절골 좌측 안쪽의 남쪽 방면으로 옛날에는 절과 승려들이 있었다고 해서 승절골이라 하며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여 승적골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