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18년에 태어난 학자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호가 매죽헌으로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세조 2년 참살되었다. 외손 박호가 홍성에서 봉사하던 중 1903년 고종의 어명으로 족후손 성주영이 봉사손이 되어 사우를 건립하고 봉사하였으며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문절사라 현판 하였음.
그의 나이 13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자 화사동 골짜기에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시묘를 하였는데 이때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굶주림에 시달려 겨우 목숨만 유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학문도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윤자의 뜻을 캐물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그의 일가친척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충과 효를 가르쳤다. 강협의 정려는 1905에 건립되었다.
병산사는 한말의 항일의사 성기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우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1972년 문인과 고을 유림들이 사우를 짓고 매년 음력 3월 7일에 후손들과 많은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곳에는 선생의 문집과 영정목판 250개를 소장하고 있다.
어느 날 남편 진회 현씨가 가까운 부강장에 솥을 사러 갔다가 장꾼들과 합세 되어 독립만세를 부르다 목숨을 잃으니 18세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김 씨는 어린 유복자를 데리고 전전긍긍 이집 저집으로 찾아다니며 손에 잡히는 대로 품팔이 등을 하며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다. 그녀의 이러한 인내와 결심은 헛되지 않아 얼마간 농토를 장만하여 잘살게 되었으니 후손들이 정려를 건립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화순 최씨 참판공 재실은 화순 최씨 종중재실로서 화순 최씨 참판공 최한정선생과 그의 아들인 도승지 최중온 선생을 제사하는 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