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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별자치시 읍면동

봉산리

조치원 마을 봉산리 사진

지리

봉산리는 조치원 서북단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서창리와 신안리, 남쪽은 침산리와 연서면 월하리, 서쪽은 연서면 고복리, 북쪽은 전동면 송곡리와 연접해 있으며 오봉산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다.

연혁

옛 지명이 토흥부곡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연기현 북일면에 속했다. 1914년 낙은리, 동리, 저촌리를 통합하여 동리(東里)로 개칭되어 북면에 속했다가 1917년 북면이 폐지되면서 서면에 소속되었다. 1940년 조치원읍에 편입될 때 일제의 지명 변경으로 봉산정(鳳山町)으로 불리었다. 1947년 봉산동으로 개칭되었고 1988년 봉산리가 되었다.

지명유래

01
토흥부곡(土興部曲)

동국여지승람(1481년) 연기현 고적(古跡)편에 현 북13리에 있다(在縣北十三里)고 소개된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곡(部曲)은 신라 이후 고려 말까지 존재했던 일종의 지방행정구역 명칭이다.

02
토흥산(土興山)

봉산 영당 뒷산을 말한다.

03
동리(東里)

봉산리 전체를 말함. 강화최씨 18세손 최진원의 호가 동리(東里, 桐里)인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이미 동리라는 지명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에는 토흥리라 불렀다. 1914년 서면 동리였으나 1940년 조치원으로 편입되면서 봉산(鳳山)으로 개칭되었다.

04
호계(회계)

성주사 입구에서 전동 방향 오봉산 임도 입구까지 마을이며 원주 이씨가 많이 살고 있다.

05
자교암

호계마을에 있는 바위로 어머니가 아들이 공부를 게을리하면 이 바위에 올라서게 하고 회초리를 치며 가르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06
윗뜸(윗말)

호계마을에서 전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 오봉산 자락에 있는 마을임.

07
저촌(苧村)

봉산 1리에서 전동면 송곡리로 넘어가는 길의 우측 산자락 마을을 일컫는데 띠재(띠재말)라고도 불린다.(뒷산을 띠재산이라 부르고, 고개 넘어 송곡리를 모시터라 하는 것으로 보아 띠(억새)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08
중뜸

봉산 영당 있는 마을을 말함.

09
건너말

중뜸에서 하천 건넛마을로 봉산 향나무가 있는 마을을 말함.

10
회(灰)밭

빙고개 아래(봉산리 쪽)에 고랑으로 형성된 밭을 말한다. 이 밭에 기와 파편이 많았으며 주민들이 여기서 주운 기와조각으로 가루를 내어 놋그릇을 닦을 때 사용했는데 그 가루가 마치 회(灰)와 같다 하여 그 밭을 회(灰)밭이라 불렀다고 한다.

11
오봉산(五峯山)

해발 262m로 조치원읍의 진산이다. 전동면, 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맨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오행(木火土金水, 목화토금수)에 해당하는 오행연주형(五行連珠形) 봉우리가 모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木(정상), 火[우각봉(牛角峯), 문필봉(文筆峯)], 土[성주봉(聖周峯)], 金〔두루봉, 두우봉(斗牛峯)〕, 水(봉산향목 뒷동산)

12
장군터

현재 부뚜막 식당(건너말 고샅길 31-15) 좌측 골짜기에 용혈(湧穴, 장군이 솟아났다는 구멍)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사방공사를 핑계 삼아 당시 산자락에 있던 바위를 깨부수고 채석하여 하천제방을 쌓는 데 사용했다 하며, 그때 용혈이 훼손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장군터 전설 참조)

13
참새골(찬샘골)

봉산 1리에서 봉산 2리로 가는 길목 2차선 도로 오른편 골짜기(산20-12 일원)를 말하는 것으로 일명 천곡(泉谷)이라고도 한다. 물이 차고 맛이 좋은 샘이 있어 찬샘골이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참새골이라 불린다.

14
방축골

봉산 2리를 방축골이라 부르는데, 고려 토흥부곡 시절 가축을 방목하던 지역이라 한다. (일설에 의하면 과거에 방죽이 있어서 방죽골이라 불렸다고 하나 방죽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15
도장고개(서낭고개)

봉산침례교회 앞의 고갯길을 말한다.

16
쇳대배기(폿대거리)

봉산 1리에서 오봉산 등산로로 향하는 2차선 도로의 작은 교량 옆(봉산리 173번지 일원) 마을을 일컫는 것으로 쇳대가 박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 정조임금 재위 을묘년 윤11월 문과정시(文科庭試)에 환재 최지성(崔之聖)이 장원급제한 것을 기념하여 쇳대를 세우고 깃발을 달았던 곳이라 하여 쇳대배기 또는 폿대거리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