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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리

마을사진

지리

해발고도 300∼400m 안팎의 산지가 대부분이고 산세가 험하여 지역적으로 외진 곳이 많고 구릉지대에 밭이 조성되어 있다.

연혁

원래 이 지역은 계곡(溪谷)에 풍류(風流)가 있어서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미곡(美谷)'이란 시조(時調)와 학이 있듯이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곳으로 통칭(通稱)되어 왔으며 1914年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 마을을 병합하여 '미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조선 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구역이었다.

지명유래

운주산성(雲住山城)
전동면(全東面) 미곡리(美谷里)에 운주산정(雲住山頂)에 있는 산성을 운주산성 이라 부른다.예전에 전성부사(全城府使)가 있을 때 목민(牧民)을 다스렸다.
안렴사유허비(桉廉使遺墟碑)
'학당이'앞에 있는 비(碑)를 '안렴사유허비'라 부른다. 이 비(碑)는 안렴사(按廉使)였던 김휴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遺墟碑)다.
삼천암(三千岩)
'운주산'중턱에 있는 바위를 삼천암(三千岩)이라 부른다. 바위 밑에 크고 깊은 굴이 있어서 목천(木川) 수신(修身)으로 통하였다 하는데 임진왜란 때 이 바위에 3,000명이 피난하였다가 왜적이 여기를 지날 때 바위에 숨어있던 3,000명 가운데 어린아이가 우는 바람에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 발각되어 모두 피살되었다.
수구동(水口洞)
'미륵당이'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피난하였던 수백 명이 왜적에게 피살되어 피가 내를 이루었으므로 피숫골 또는 피수동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흉하여 '수구동(水口洞)'으로 고쳤다 한다.
학당리(學堂里)
'미륵당이'동북쪽 산속에 있는 마을을 '학당리'라 부른다. 고려 말엽 안렴사(按廉使) 김휴가 여기에 살면서 학당을 세우고 후진들을 양성한 마을이라 해서 학당리 또는 학당이 라 부른다.
미륵당(彌勒堂)
미륵당이 모퉁이에 있는 미륵으로 남녀 두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 3척(尺) 5촌, 넓이 1척(尺) 8촌이 된다.
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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