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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리

마을사진

지리

봉황산 밑이 되며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연혁

조선 말엽에는 연기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이었다. 뒷산이 성(城)처럼 되어 있으므로 '성재'또는 '성작골'그리고 '도맥(道脈)'이라고도 불려왔는데 남양홍씨(南陽洪氏)의 학자가 당호(堂號)를 성제(性劑)라 한 이가 있어 '성재'로 많이 불려 왔었다.1914년 행정개혁 때 이웃 마을을 병합하여 성제리(性劑里)라 하고 북면(北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에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연기군 서면(西面)에 편입되었다.

지명유래

서당(書堂)골
과성(窠城) 앞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효종(孝宗) 때 공판(工判) 홍우표(洪禹杓) 부자(父子)와 세문당(歲文堂) 홍우채(洪禹采)가 서당을 짓고 서생(書生)을 가르친 곳이라 하여 '서당골'이라 부른다.
승작골(勝敵洞)
고려 충렬왕 17년 원나라에 반기를 들은 합단이 쳐들어오자 고려와 원나라 장수의 연합으로 크게 승리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성제(原性齊)
성제리에 있는 마을이다. 명거(名巨) 홍이경(洪履慶)의 손자(孫子)인 홍우(洪禹)가 그 당시 명유(名儒)로서 호(號)가 성제(性齊)였으므로 그가 있던 이 마을을 원성제(原性齊)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남양홍씨(南陽洪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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